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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미래를 이끈 교육자

"길영희 (吉瑛羲)"

길영희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위에 빛나는 숨겨진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인천愛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들을 찾아 떠난다.
이번 호는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교육자 ‘길영희’ 선생을 소개한다

농민 계몽에

앞장서다

제물포고 초기모습(출처:인천시청 홈페이지)제물포고 초기모습(출처:인천시청 홈페이지)

인천 교육의 개척자이자 도덕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한 교육자가 있다. 제물포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이자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길영희 선생이다.
그는 평안북도 희천군 태생으로 1918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에 학생대표로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퇴학을 당했다. 의사의 길이 막혀버린 그는 새로이 교육자를 꿈꾸며 24세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길영희 선생은 10년 동안 배재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로 일하면서도 그는 농민과 농촌계몽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농과대학의 설립을 목표로 1938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건설했다. 그는 학교를 떠나 이곳에서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고 농민을 가르쳤다.

양심의 가치를

가르치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인천중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길영희 선생을 찾아왔다. 그를 교장으로 추대하기 위해서다. 인천중학교의 교장이 된 그는 민족교육 수립에 앞장섰다. 영재교육을 운영해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문교부가 주최하는 전국학술경시대회에서 3연승을 달성하는 실적을 올렸으며, 전국 중학교 가운데 가장 높은 서울대학 합격률을 보여줬다. 6년제 중학교에서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바뀌면서 그는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56년 제물포고등학교에 무감독 시험을 도입했다.
이는 학생을 믿고 교사가 시험을 감독하지 않는 제도다. 지금도 제물포고등학교 학생들은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고 선언하며 무감독 시험을 본다. 이 외에도 규율부를 두지 않고 학생이 전교생 월례조회를 주관하며, 별도의 운동부 없이 전교생이 체육부원으로 활동하게 했다. 1961년 정년퇴임을 한 이후에도 그는 자택에서 가난한 이를 가르쳤으며, 1967년 충남 예산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농민교육을 이끌어갔다. 평생을 교육에 힘쓴 그의 삶과 양심에 따른 자율을 존중한 교육철학은 여전히 되새겨지고 있다.

인천인물 사전

김란사 사진

길영희

  • 1900 평안북도 희천 출생
  • 1918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 1938 후생농장 건설
  • 1945 인천중학교 교장 취임
  • 1954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겸임
  • 1956 무감독 시험제 창안
  • 1961 정년퇴임
  • 1967 가루실 농민학원 설립
  • 1984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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