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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강화의 딸

"권애라 (權愛羅)"

권애라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위에 빛나는 숨겨진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인천愛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들을 찾아 떠난다.
이번 호는 개성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 ‘권애라’ 열사를 소개한다.

개성을 뜨거운

함성으로 물들이다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일제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투쟁했던 인천의 여성들이 있다. 그중 권애라 열사는 개성의 독립만세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1897년 강화도 교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 개성으로 이주하고, 1918년 이화학당 유치원사범과를 졸업했다. 그녀가 모교인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의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28일, 오화영 목사를 통해 개성으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됐다. 하지만 배포하는 이가 없었고, 3월 1일 독립선언서 도착 소식에도 만세시위가 시작되지 않자 이유를 확인한 그녀는 북부 예배당 지하실에 숨겨져 있던 독립선언문을 들고 나왔다. 이후 어윤희 열사와 함께 개성 시내에 배포했으며, 다음날에는 호수돈여학교 기도실에서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그리고 3월 3일, 권애라 열사와 학생들은 거리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시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점차 군중들이 가세하면서 규모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개성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그녀는 1919년 5월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선 여성의

애국사상을 일깨우다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독립에 대한 열망이 퍼진 조선에는 많은 강연회가 열렸다. 출옥 후 권애라 열사는 여러 강연 무대에서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애국사상을 일깨우고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간 그녀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고,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 대표로 참가했다. 여기서 그녀는 황옥경부폭탄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시현을 만나 결혼한다. 이후로도 그녀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광복운동을 진행했다. 1942년 4월 아들 김봉년과 일제에 붙잡혔으며, 창춘형무소에서 징역 12년 형을 살다가 1945년 광복으로 석방됐다. 고국에 돌아온 그녀는 김시현의 동지로 통일과 반독재투쟁의 길을 걷다 1973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힘써온 그녀의 공로를 기리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인천인물 사전

권애라 사진

권애라

  • 1897 강화도 교동 출생
  • 1918 이화학당 유치원사범과 졸업
  • 1919 개성 3·1 만세운동 주도
  • 1922 극동인민대표회의 조선대표 참여
  • 1940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
  • 1943 징역 12년형 선고
  • 1945 광복으로 석방
  • 1973 별세
  • 199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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