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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울타리로 치안에 힘쓴 경찰

"전창신 (全昌信)"

전창신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위에 빛나는 숨겨진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인천愛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들을 찾아 떠난다.
이번 호는 조국 독립부터 약자 보호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창신’ 경감을 소개한다.

함흥의 3·1운동을

추진하다

경찰 사진사진 출처 : 경찰청

목숨을 내놓고 대한 독립을 외친 이들. 수많은 독립운동가 덕분에 오늘의 평화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중에서도 전창신 경감은 독립운동가이자 인천여성경찰서장이었다.
그녀가 독립운동을 펼친 곳은 인천이 아니다. 1900년 1월 24일 함경남도에서 독립운동가 정원교의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대한독립을 꿈꿨다. 그리고 열세살이 되던 해 구송결사대를 조직해 성진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함흠영생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그녀는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50여명의 동지와 함께 태극기와 선언문을 작성하고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등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획이 노출되면서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3월 18일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 공훈을 인정받아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약자를 지키는

경찰이 되다

일제에 해방된 후 1946년 미군정은 여성·아동 등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여자경찰제도’를 도입했다. 1947년 3월 1일 서울여자경찰서가 창설됐으며, 이어 5월 부산·대구·인천에도 여자경찰서가 설치됐다.
전창신 경감은 1946년 6월 여자경찰 간부후보에 지원해 선발됐다. 마흔다섯의 늦은 나이에도 그녀는 고된 경찰학교 훈련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리고 왜경·순사라고 멸시받던 경찰 조직을 자신의 손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키웠다. 이후 서울여자경철서에서 근무했으며, 1948년 8월경 제3대 인천여자경찰서 서리에 임명됐다. 1950년 11월에는 제5대 인천여자경찰서장을 역임했고 1951년 10월 퇴직했다. 그녀는 퇴임할 때까지 여성 피해자와 피난민 등 약자들을 보호하는데 힘썼다. 또한 인천여자경찰서에 애육원을 설치하고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을 지켰다.
중구 신포로23번길 49, 이 길 위에서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2019년 인천경찰청과 중구청에서 전창신 경감의 기념물을 제작해 설치했기 때문이다. 기념물에는 인천여자경찰서 설치 배경과 경과, 전창신 경감의 독립운동 이력, 주요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인천여자경찰서 과거 사진과 전창신 경감의 부조가 삽입되어 있다.

인천인물 사전

전창신 사진

전창신

  • 1900 함경남도 출생
  • 1919 함흥 3·1 운동 주도하다 투옥
  • 1924 독립운동가 김기섭과 혼인
  • 1946 여자경찰 간부후보 선발
  • 1948 제3대 인천여자경찰서 서리 임명
  • 1950 제5대 인천여자경찰서장 역임
  • 1951 제8대 인천경찰서장 퇴직
  • 1985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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