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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에 부는
미풍(微風), 미풍(美風)"

경동거리 사진 사진

경동 거리는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도시의 뒤안길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멈춰 선 채로 있었다. 인근 신포동이 기지개를 켜고 존재감을 발휘할 때에도 경동은 아련한 풍경으로 담담하게 존재했다. 그런 경동에 바람이 불어 오고 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의미 있는 바람 속을 거닐었다.

거리의 역사

경동거리 카페 사진

140여 년 전, 인천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을 때, 조선 땅을 밟은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길목이 싸리재였다. 민가가 거의 없던 싸리재로 사람이 모였고, 외리(外里)라는 지명도 갖게 되었다. 여러 요릿집과 활동사진관도 생겼다. 1928년 8월에 인천의 밤 풍경을 취재한 별건곤 기자는 사찰과 성당에서 종을 치면 사람들은 저녁인줄 알고 집으로 돌아가고, 활동사진관인 애관의 관객을 모으는 음악소리와 요리집의 장고 소리가 요란히 일어난다고 썼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외리의 밤 풍경이다. 외리는 1930년대에는 경정(京町)으로 바뀌었고, 해방 뒤에는 경동이 되었다.
도시의 화려함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경동하면 사람들은 예식장, 가구점, 양복점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규모가 큰 병원도 있었고, 병원을 따라 약방이나 약국에도 사람이 붐볐다. 붐비던 도시의 흔적이 경동에 남아있다. 길가에 서 있는 두 곳의 요양병원, 얼핏 보이는 가구점 간판들, 낡은 양복점 간판들이 다 거리의 역사이며 시간의 흔적이다. 쇼윈도 너머로 기능올림픽 메달을 건 마네킹,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진주 목걸이를 감은 마네킹이 서 있다. 누군가의 흑백 결혼식 사진과 먼지 묻은 범선도 빛이 바랬다. 애처롭다. 시간을 버티어낸 이 거리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곳은 역시 애관극장이다. 2018년 8월, 별건곤의 기자가 애관극장 주변을 살핀 지 90년 뒤, 누군가 이 길을 걷는다. 밤이 아니고 대낮이다. 기록적인 무더위로 인적마저 뜸한데 영화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삼삼오오 극장 밖으로 나온다. ‘인크레더블2’를 보았다는 초등학생 남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인근에 살아서 이 극장에 왔고, 극장의 나이는 무척 많다고,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보다, 옆에 있는 누나보다 훨씬 많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어린이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그 자리에 미쁘게 애관극장

  • 애관극장 티켓박스 사진
  • 애관극장 전경사진

입구의 작은 매표소를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대형 멀티플렉스가 주는 위압감이 없어서일 것이다. 안도감이 드는 편안한 분위기다. 열두 살 소년이 무척 많다고 했던 애관극장의 나이는 19세기 후반인 1895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협률사(協律舍)라는 이름의 극장이 인천에 문을 연 때이다. 포털 사이트에 주로 나오는 1902년 서울의 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다. 인천의 협률사는 축항사를 거쳐 애관으로 변모했다. 1920~30년대 신문기사에서는 외리 애관 혹은 인천 애관 기사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철가면’과 같은 최신 영화 상영은 물론, 제물포청년 제1회 정기회, 인천남녀명창대회, 조선영화대회 같은 행사도 애관극장에서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을 견디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세태가 고속철도보다 빠르게 휙휙 변하는 탓에 소신과 처신이 힘들다. 하물며 상업시설인 극장이야. 때문에 애관도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미쁘게 서 있다. 고마운 일이다.

숨결 살려 새롭게 카페

  • Brown Hands 내부 사진
  • Brown Hands 간판 사진

커피 사진

애관극장을 나와 배다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난 봄 문을 연 갤러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가는 길에 눈에 띄는 곳을 발견했다. 격자형 창문과 노란 타일이 잔뜩 붙은 4층짜리 건물. 이끌린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는 로터리클럽 글씨가 박힌 얼룩진 거울이 걸렸고, 접수창구도 있다. 무엇 하던 곳일까, 지금은 무엇 하는 곳일까, 궁금해서 고개를 빼고 안을 살핀다. 바닥부터 인테리어까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마 이런 관찰자가 많은 모양인지 “카페에요, 들어오세요.” 소리가 마중 나온다. 널찍한 1층에서는 계산만 하고 2층부터 4층까지 테이블을 놓아 한갓지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꽤 이름난 이비인후과 건물이었다고 한다. 2000년대 초까지 진료하고 근 20년간 비어있던 곳이 베이커리 카페로 바뀌었다.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도 병원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소멸할 뻔한 기억과 흔적을 되살려 놓은 카페에서 얼음 든 커피를 마신다. 그 짧은 시간과 행동이 이 건물 안에 또 다른 무늬로 남겨지겠지. 카페를 나와 둘레둘레 살펴보니 인근에 새롭게 꾸민 카페들이 꽤 보인다.

골목에 부는 싱그러운 바람 플레이스막 인천

플레이스막 전경 사진

  • 플레이스막 간판 사진
  • 플레이스막 내부 사진

플레이스막은 갤러리다. 갤러리라 하면 떠올리는 보편적인 이미지들, 멋진 외관, 흰 벽, 세련된 조명 시설 등과는 거리가 멀다. 먼지가 내려앉은 타일 벽체의 이층 건물, 창문에는 잉글랜드라는 글씨가 선명하고 그 아래층에 살구색 페인트를 입혔다. 플레이스막이라는 네온 간판을 찾지 못한다면 그냥 지나치고 말지도 모를 전시회장. 내부도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붉은 벽돌 벽은 흙이 가득 묻은 채이고 천장 나무는 검은 몸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원래 양장점이었어요. 이층에서 옷을 만들고 일층은 판매하던 곳인데 벽과 천장을 뜯어내고 보니까 이런 흔적들이 나왔어요.” 플레이스막 인천의 유기태대표가 공간 설명을 한다. 숨어있던 나무 계단, 옛날 방식의 전기 배선 구조물, 못 자국까지, 거칠지만 흥미롭다. 플레이스막의 ‘막’이 ‘아무것이나 막한다’는 뜻이라더니 공간 역시 ‘막’스럽다. 분방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INTERVIEW

플레이스막 인천 대표 유기태

플레이스막 인천 대표 유기태

경동에 갤러리를 연 이유는?
문을 열기 전에 3개월을 고민했어요. 인천에 연고도 없고 지역적인 특색을 잘 모르는데 가능할까 걱정하다가 진정성 있게 예술을 담으면 될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두 번의 전시회를 마친 소감은?
주위에서는 이곳이 문화 불모지라고 말하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오프닝 때도 사람이 많이 왔지만 전시 중에도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관람하고 질문하는 분이 많았어요. 다른 곳에서는 주민들이 자기 동네의 갤러리 문을 열기까지 한참이 걸리거든요. 공사를 할 때도 일부러 동네 분을 소개받아 작업했는데 성의껏 친절하게 일을 해주셔서 놀랐어요. 제 동료에게 “왜 이렇게 친절하지? 우리가 운이 좋은 건가?”라고 말할 정도였죠. 혹시 인천은 낯선 외부를 열린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건가,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어요.
갤러리 자체의 개성이 강한데, 이유라도?
길로 난 큰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는데, 이렇게 자연광에 노출된 갤러리는 많지 않아요. 설치나 개념적인 전시를 하면 될 것 같아서 이 구조를 살렸어요. 관객이 일부러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관람할수도 있으니까, 주민이나 지역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정착하기에는 좋은 여건인 것 같아요.
플레이스막 인천이 어떤 공간이기를 희망하는지?
이웃에 카페나 편의점이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데 갤러리나 문화공간은 필터를 하나 설치하고 바라봐요. 저는 문턱이 낮은 문화공간을 항상 꿈꿔요. 누구나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좋은 콘텐츠를 보여주는, 카페나 편의점처럼 편안하게 다가서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신연호
사진
이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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