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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 파노라마"

문학산 사진

비류가 인천 미추홀에 온 까닭

『삼국사기』는 ‘주몽의 큰 아들 비류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미추홀에 정착했다’라는 것을 전하고 있다. 한국사 연표에서 보면 백제가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18년으로 지금부터 2036년 전의 일이다. 인천을 경주, 부여 등과 같이 고대국가의 서울이었음을 부각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뒤로하더라도, 형인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농경에 유리한 풍요로운 땅에 안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남하하는 동료들이 비류에게 풍요로운 땅 하남으로의 선택을 제안하지만, 비류는 미추홀 인천으로 향하는 결단을 보였던 것이다. 인천의 역사는 비류의 미추홀정착과 함께 시작된다. 그렇다면 비류는 왜 바다 도시 인천을 선택했을까. 그 의문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풀어내야 할 과제이지만 연구자는 바다와 가까운 입지 조건 그리고 소금의 산지와 교역망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성장을 꾀하려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세는 해상활동에 적합한 곳이란 점과 바다로의 진출이라는 진취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해양 도시 인천은 비류의 꿈에서부터 출발했고 그 꿈의 실현은 오늘날 우리 인천인에게 숙명적인 과제로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비류는 대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미추홀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를 따르던 세력들은 온조와 통합하여 10제(十濟)에서 100제(百濟)를 탄생시켰다. 백제의 국가 형성은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온조 집단과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류 집단의 대통합 결과였다.

미추홀구의 탄생

2018년 7월 1일부터 인천광역시 남구의 명칭이 미추홀구로 변경됐다. 방위(方位)식 명칭은 1968년 구제(區制) 실시 당시 전국적으로 사용되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특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산업화로 인해 더 이상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만큼 퇴색해버렸고, 오히려 지역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지명으로 개명하자는 논의는 일찌감치 제기되어 왔고, 그의 실천으로 인해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했던 성공적 사례도 많다. 미추홀구는 조선시대 인천도호부가 있었던 중심지로 북쪽의 수봉산(壽鳳山, 115m)과 남쪽의 문학산(文鶴山, 217m) 사이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삼국시대 초기의 도읍은 대체로 평지에서 벗어난 구릉의 대지에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문학산과 맞은편에 위치한 승학산이 이루고 있는 관교동과 문학동 분지를 들 수 있다. 문학산은 노적산, 연경산, 문학산, 수리봉, 길마산 등 5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일렬횡대를 이룬 약 2.5㎞ 길이의 작은 산괴이다. 동쪽으로는 남동 염전의 갯벌, 승학천을 따라 이어지는 저지대가 고대에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기 국가 단계의 도읍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명칭

등문학봉(登文鶴峯) 원문등문학봉(登文鶴峯) 원문

문학산(文鶴山)이라는 명칭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초기의 명칭은 인천도호부 관아 남쪽에 있어서 남산(南山), 산성이 있어서 성산(城山)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인천부사로 재임 중 학문과 교화에 힘썼던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 ‘학산(鶴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게 됨에 따라(1768년) 여기에 인천 향교의 문묘(文廟)를 합하여 18세기 후반기쯤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 17세기 중엽에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인 권시(權諰, 號 炭翁: 1604~1672)가 문학산에 올라 지은 시(詩)『등문학봉(登文鶴峯)』에 ‘문학’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있어, 그 이전부터도 이미 문학산이라 불려왔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문묘의 ‘문’(文)은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었다하더라도 그렇다면 학산은 학(鶴)의 형세를 닮아서 생긴지명인가? 문학산 정상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청량산과 봉재산 줄기가 마치 (새의)날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학산은 이보다 우리말 ‘둠’ 또는 ‘두룸’에서 온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주변을 빙 둘러싸다’는 ‘두르다’의 옛말 ‘두루다’에서 나온 명사형으로, 이 ‘두룸’이 ‘두루미’로 발음되고, 이 말이 날아다니는 ‘새(鳥)’ 두루미, 곧 학(鶴)으로 붙여져 ‘학산’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문학산의 군사적 입지

  • 문학산 사진1
  • 문학산 사진2

문학산성의 봉수는 갑오개혁을 전후로 봉수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멀리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하여 진도, 수원, 그리고 안산의 정왕산 봉수에 잇닿고 있었으며 다시 부평, 김포, 강화, 양천을 거쳐 한성의 남산에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의 군사적 통신수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천 도호부 관아의 남쪽에는 청량산과 문학산이 있고 북쪽에는 주안산이, 북동쪽에는 소래산이 둘러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가 트여 있었다. 또한 동쪽으로 경신역(慶信驛)을 가면 그곳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안산(安山)과 금천(衿川)으로 가는 육로가 있고, 북쪽으로 소래산을 끼고 성현(星峴)을 넘으면 부평에 이르며 이를 통해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가서 제물포 나루에 닿으면 영종도나 강화도로 가는 배를 탈 수도 있어 결국 바깥 지역 어디로든 연결될 수 있는 중심의 자리에 있는 셈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했던 1871년, 당시 인천부사 구완식의 조카 구연상이 저술한 『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는 4월 6일부터 5월 23일까지 총 48일간, 미국 전함의 종적과 문학산 진중에서의 전시체제 상황을 기록한 자료인데 이를 통해 인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문학산성은 인천의 남쪽을 받치고 있으면서 서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 생활근거지에서 입성하여 전술을 수행하는데 용이했고, 방어에도 유리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관계로 개항기까지 서해 연안방비의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9·15인천상륙작전 당시 용현동 일대로 진입하는 ‘블루 비치(청색 해안)’의최종 확보 지점이 문학산이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문학산 일대의 문화유산

  • 문학산 일대의 문화유산 사진1
  • 문학산 일대의 문화유산 사진2

문학산 일대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과 각종 석기류와 무문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것은 삼국시대 이래 문화·행정의 중심지로 형성되어 원(原)인천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문학산 주봉과 연경산 사이의 ‘삼호현(三呼峴, 사모지고개)’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시기 중국으로 떠나는 백제 사신들이 부평의 별리현(別離峴, 별고개)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현재 옥련동 능허대 옆의 한나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이별의 아쉬움은 설화로 승화되었고, 술바위, 중바위, 삼해주바위, 사모주바위, 효자바위 등 자연물과 장소, 역사적인 이야기를 모티브로하는 다양한 전설(傳說)들이 전승되고 있다. 또한 ‘문학산 제사 유적’은 중부지방에서 최초로 확인된 8세기경의 제사 유적이라 할 정도로 제사터로서의 유구한 역사성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문학산 일대는 그 역사적 원형이 상실되었다. 광복 후인 1949년 ‘문학산 방면 고적전설조사보고서’를 통해 둥근형의 우물지나 토축의 봉수대 등, 그 원형을 일부 파악했다. 성내 시설물로는 우물과 봉수대, 안관당 등이 확인되고 있지만, 1962년 군부대 주둔으로 삭토되면서 이때 봉수대와 건물지, 동·서문자리 등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관당은 1949년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문학산 봉수 아래 석축의 건물이 있는데, 조선 후기의 건물로 임진왜란 때 산성에서 왜적과 싸운 인천부사 김민선을 모신 사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학산성은 뒤늦게나마 1986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16년 6월 문학초등학교 운동장 서쪽 끝 매장문화재 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석렬(石列) 유적과 담장, 배수로, 건물지 4기, 구들시설, 기초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고려 및 조선시대 기와편과 백자편 등 총 64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주변에 상당수의 매장문화재가 잔존해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문학산 개방

문한산 정상 기념비 사진. 미추홀 고도(高都) 문학산 날개를 펴다. 2015.10.15

6.25전쟁 이후 문학산 정상은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됐다. 1958년 이래 문학산 정상은 군사시설이 되었고, 1961년부터 1979년까지는 미군부대가 주둔했다. 미군부대가 떠난 이후에도 또다시 한국 공군 미사일부대가 2005년까지 주둔했다. 1998년 미사일오발 사고를 계기로 2005년 문학산 정상의 군부대가 영종도로 이전하였다. 이어 2010년 ‘문학산성 성벽보수 및 탐방로 조성공사’를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5년 10월 15일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정상부 일부가 50년 만에 개방되어 인천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매년 문학산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나아가 이제 곧 ‘문학산 역사관’이 9월 1일 개관할 예정이다. 문학산의 역사적 가치와 현재적 의미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시의적절한 사업인데,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등산로 정상에 생겨난 ‘역사관’은 그리 흔치 않은 것으로 의미 있는 기획이다. 땀을 식혀가며 즐길 수 있는 문학산 파노라마. 2030여 년 오랜 인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 그곳에 있다.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강덕우 대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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