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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철도 119년"

옛 경인철도 사진

철도는 1814년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하여 동력이 기계화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1825년 영국이 철도 건설을 시작한 이래 1832년 프랑스, 1834년아일랜드, 1835년 벨기에, 1836년 캐나다에서 각각 개통되었는데,
동양에서도 1853년 인도를 선두로 1872년 일본, 1876년 중국이 부설했다.
철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에 의해서였다.
그 뒤 1880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문제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과 주미 조선공사 박정양도 철도를 소개하였다.
그러다 1889년 미국에서 귀국한 주미 대리공사 이하영이 가지고 온 정교한 철도 모형을 봄으로써 철도 부설 문제가 정식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철도 부설에는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는 관계로 실천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제물포 사진청일전쟁 당시 제물포

청일전쟁의 발발과 잠정조약의 체결

철도 부설 논의가 현실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때였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일본은 청군의 파병이나 통보와 상관없이 이미 병력을 동원하였다. 400여 명의 일본군을 인천 제물포에 상륙시켜 서울로 진격, 점거했다. 나아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조선 왕실을 장악했다. 이어 조선의 내각을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일본은 군사상의 목적에서 ‘경부선·경인선 간의 철도 공사는 한국 정부가 재정이 아직 충분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한 회사와 체결하고, 시기를 보아서 이를 기공한다’는 조항을 명확히 규정하고, 강압적으로 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잠정조약은 처음부터 조선 정부의 반감을 사고 있었고, 동학농민군 등 항일운동세력의 공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등 4국의 공사가 철도이권을 일본에만 독점적으로 양도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공동 항의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사바찐의 목격

사바찐(Seredin Sabatin)은 중국 상하이에서 일자리를 구하던 러시아 출신 무명의 ‘거류지 건축가’였다. 1883년 9월 사바찐은 부인과 함께 24세의 나이로 인천에 입항, 인천해관의 토목사(土木師)라는 직명을 갖게 되면서 인천해관 청사의 설계 및 인천항 부두공사 축조를 시작했다.1884년에 건축된 인천 세창양행 사택은 인천 개항 직후건축된 한국 최초의 양관(洋館)으로 사바찐을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진행되던 중 일본군은 경복궁 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고종을 억류하고 친청파를 제거했다. 고종은 외국인을 책임자로 한 경복궁 시위대를 조직하였는데 시위대장으로 미국인 퇴역 장군 다이(Dye)를, 부대장으로는 고종이 신임했던 사바찐을 임명했다. 궁궐의 호위를 맡던 중 1895년 10월 8일 사바찐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다. 사바찐은 폭도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나를 해치지 말 것을 간청’함으로써 한국 근대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국모시해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급기야 다음 해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살이를 떠나는 ‘아관파천’이 단행되었다.

경인철도 우각역 기공식 사진경인철도 우각역 기공식(1897)

모스(James R. Morse)의 등장

아관파천 이후 반일 여론이 비등한 와중에 미국공사 알렌은 즉각 고종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요구하여 1896년 3월 29일 1년 이내에 기공(起工)하기로 하고, 모스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기공 후 3년 이내에 준공(竣工) 하지 않으면 허가가 취소되는 조건이었다. 모스는 알렌의 도움과 인천의 타운센드와 함께 회사를 설립하고 콜브란을 기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미국 자본가들의 투자유치에 실패하면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기공식에는 본인이 참석도 하지 못한 채 계약 만료 며칠을 앞둔 1897년 3월 22일 우각현에서 거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일본 측은 인수조합을 조직하여 1897년 5월 ‘18개월 내에 완공한 뒤 인수조합에 양도하는 계약’을 모스와 체결하였다. 토목공사가 반 정도 완료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약점을 알고 있는 모스는‘계약 철회’라는 수단으로 재차 매각 줄다리기에 들어가 최대한의 금액을 요구했고 1899년 1월 인수조합은 부설권을 빼앗기지 않는 선에서 모스를 만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수조합은 일체를 매입한 후 설계를 일부 변경하여 1899년 4월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허가조건대로 하면 1900년 3월까지는 경인선이 준공되어 야 하나, 외교적 압박을 행사해서 6개월간 기간 연장을 허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난공사인 한강철교를 완공하지 않은 채 1899년 9월 18일 가영업식을 거행하였다.

경인철도 개통식 사진경인철도 개통식(1899, 인천역)

한강철교의 완공

모스는 경인철도 부설 및 한강 철교 가설도 해야만 했었다. 처음 계약에 따르면 ‘보행자의 편의를 위하여 다리 한쪽이나 양쪽에 보도(步道)를 만들어야 하며, 선박의 운항을 위하여 개폐부를 만들거나 충분히 높게 가설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다리 건설은 1897년 착공하여 교각의 일부가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부설 계약을 인수한 뒤 공기(工期) 지연과 과다한 공사비에 대한 불만을 숨기고, 인천 거주 일본 거류민의 편의를 위해 하루속히 완공시켜야 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보도 가설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계약 파기에 대한 저항이 무시되었음은 당연했다.
근대식 토목 공사로는 가장 규모가 컸던 한강철교 공사는 1900년 7월 5일 완공되었는데 4개월간의 가영업을 끝내고 11월 12일 서대문 정거장에서 경인철도의 ‘공식’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봉건사회를 자본사회로 변화시키는 도화선이고 또 개화의 촉매이기도 했던 경인철도는 서글프게도 조선 최초 철도 개통식에 일장기가 나부끼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한강에 인도교(人道橋, 현 한강대교)가 설치된 것은 1917년의 일이다.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강덕우 대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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