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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가 날던 섬 국제공항으로"

영종도공항

영종도는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한 섬 아닌 섬으로 월미도에서 서북쪽으로 2.5㎞ 지점에 위치해 있고, 한강과 예성강이 합류하여 황해로 들어가는 합수점(合水點)에 있어 해수와 담수가 교차 되는 지역이다. 그리하여 바다 수심이 낮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풍부한 어패류가 생식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유입을 유인하는 기반이 되어 많은 유적이 남게 되었다.

옛 영종도 사진

영종도 지역이 본격적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영종도의 원래 명칭 인 ‘자연도(紫燕島)’라는 이름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객관(客館)인 경원정(慶源亭) 이 있는 산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였다. 제비 (燕, 제비)의 자줏빛(紫, 자줏빛 자) 형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10세기 고려와 송(宋)은 양국이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요나라, 遼)의 압력 하에 있다 는 공동인식 때문에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고려와 송 양국의 교통은 가능한 한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려는 데서 명주항로(明州航路)를 택하기로 합의하고 있었 는데 명주항로란 예성항(禮成港)에서 자연도, 고군산도, 흑산도를 거쳐 중국 명주(明 州)에 이르는 항로를 말함이다. 이에 따라 명주항로의 중간거점의 하나였던 자연도 에 경원정이란 객관이 건립되어 송나라 사신과 상인을 접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경원(慶源)은 인주(仁州)의 옛 이름으로 지명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군사기지로의 전환

명주항로명주항로

조선 전기 경기도의 해방(海防)은 좌, 우로 구분하여 ‘남양 (南陽)과 교동’에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좌도 수군(水軍) 은 남양만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오는 경기도 연안항로를 방비하고 우도 수군은 교동, 강화지역을 방어토록 하였는 데, 수군의 주된 목적은 ‘왜구’를 근해에서 격퇴하여 상륙 을 저지하는데 있었다. 이 당시 영종진은 아직 남양에 있 었고, 인천의 제물량은 도성으로 진입하는 연안항로의 길 목으로 활용되는 조운선(漕運船)의 수로였다.

임진왜란 이후 ‘남양’이 바다와의 거리가 멀어 해양 방어 에 부적절함을 이유로 ‘강화도’ 중심으로 방어 체제가 변 화되었는데, 남양의 영종포는 그 명칭은 바꾸지 말고 다 른 곳으로 이전할 것을 종용받았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 대((1649~59)의 북벌계획에 따라 남양의 영종진이 자연 도 태평암(太平巖, 현 구읍뱃터)로 이전됨에 따라 자연도 의 명칭은 영종도로 변경되었다. 이에 강화도를 중심으로 ‘영종과 교동’이 좌우익이 되면서 영종진은 인천·부평·안 산 등의 수군 업무까지도 관할하는 군사 요충지로 부각하 였다. 또한 이 시기 강화도 방비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 해 안산의 초지진(草芝鎭)과 인천의 제물진(濟物鎭)이 강 화도로 이설(移設)되었고, 유사시 강화도로의 도강을 위 해 인천 월미도에는 월미행궁(行宮)을 건립하게 하였다. 이것은 갑곶진을 통과할 수 없게 될 경우 영종도를 통하여 강화도에 입수하려는 계획이었다.

 

개항의 길목, 일본의 음모

작약도 남쪽 해안에서 본 영종도(신미양요 사진첩)작약도 남쪽 해안에서 본 영종도(신미양요 사진첩)

일본은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어 1868년 수백 년 동안의 막부 체제를 끝내는 메이지유신 (明治維新)을 단행하여 근대 서양의 체제를 모방했다. 거 기에 개항을 전후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일본의 공업 은 상품 수출시장을 위해 처음부터 무역의 불균형을 전제 로 조선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고, 서구열강들이 동양의 약소국에게 의례적으로 행해왔던 ‘함포책략’을 선 택·결정했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가 출항하기 전 이미 ‘사건의 수습 책’에 관한 자세한 매뉴얼을 미리 만들어두고 있었다. “평 명주항로 작약도 남쪽 해안에서 본 영종도(신미양요 사진첩) 화적으로 활동 중이던 운요호를 조선이 느닷없이 공격했 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위권을 발동했을 뿐”이라는 내 용을 세계 각국에 주지시켜 피해 보상을 강력히 요구하 고, 개항을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교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청국과 영국, 미국 등 주변 열강들에 게 협조를 구한 것은 물론이다.

영종진 피격사건은 일방적인 포격전이었다. 운요호는 근 대 전함으로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영종진은 무너졌고, 이들은 영종도에 상륙 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했다. 조선 정부는 영종진의 병력 을 보충하고 무기를 강화시키는 등 방위력 증강을 위해 노 력하였지만, 근대적 무기 체계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 다. 이 전투로 조선 병사 35명이 전사하였고 16명이 포로 가 되었다. 그리고 대포 36문과 화승포 130여 정 등은 전 리품이 되어 일본군 사망자 1명과 함께 야스쿠니신사(靖 ?神社, 정국신사)에 보내졌다. 남은 일정은 곧이어 도래 할 불평등조약이었다.

영종도의 지난 역사는 영욕이 교체했다. 그러나 해상교류 의 거점으로, 국방상의 요충지로 그 역사적 유구성과 문화 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현재 지정과 비지정 문화재를 포함 하여 100여점이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영종도로 의 개명은 지명이 뜻하는 바와 같이 ‘길 永(영)’, ‘마루 宗 (종)’으로 ‘긴 마루’가 마치 활주로를 연상케 하고 있어, 이 곳에 세계와의 교류를 위한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입 지할 것을 예측한 측면도 없지 않다. 거기에 더해 경제자 유구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전통적 역사성과 현대적 세 계성이 공존하는 국제적 관문도시 영종도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인천의 미래 자산으로 그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강덕우 대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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