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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단상

"어느 퇴직 교원의 자화상"

‘공맹(孔孟)의 가르침이 나아감과 채움이라면 노장(老莊)의 가르침은 멈춤과 비움이다’에 공감을 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만들어가는 나의 자화상은 진행 중이다.

가르침으로 그린 나의 자화상

어린 시절은 참 힘들고 어려웠다. 꿈이니 희망이니 비전은 내 편이 아니지 싶었다. 죄 없어 눈이 맑았던 아름다운 시절을 날줄로,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을 씨줄로 일어설 수 있음은 감사였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뒤 늦은 진학은 평생의 디딤돌이었다. 멀리 돌아 교단에 선 초임교사가 있었다. 첫 학생들 앞에서의 떨림과 그 어색했던 언어, 멋쩍은 몸짓들은 아직도 선하다. 열정 하나로 좌충우돌한 시행착오들을 정성이고 사랑이라 우기기도 했다. 배우고 가르치며 격정토론을 마다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하며 스스로를 단련했다. 사랑과 책임, 의무가 따라오는 사도의 길은 멀리 있는 듯 했다. 이렇게 달려온 교사생활은 긍지와 사명감, 그리고 보람도 알게 해 주었다. 시간의 흐름으로 자신감인지 잘난 체인지 나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이 사십대는 무언가 성취하지 않으면 슬픔이지 싶었다.

첫 그림의 완성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즐거워야 열정이 일고 열정이 있어야 평균 이상의 탁월한 교육일 수 있다’고 믿었다. 바른 방향의 좋은 교육을 하겠다는 새로운 다짐으로 교육전문직원으로 전직을 했다. 사람에게서 구하고자 했고 이는 신념이고 사랑이며 기도였다. 학교와 교육청에서 학생, 교직원, 학부모와 소통하며 공감대를 넓혀갔다.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외길을 걸었다. 좋아하는 일이어서 최선을 다 했고 보람과 행복이 함께한 40여년의 시간들이었다. ‘더 느리게, 더 낮게, 더 비움으로’ 삶을 되돌아보고 일상에서의 행복을, 또 다른 희망을 열어가겠다고 호기 있게 정년을 했다.

비움에서 시작된 채움의 그림

자유인으로 ‘나만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운영했다. 언제든 수정, 보완, 취소가 가능했다. 버킷리스트도 장·단기로 촘촘하게 마련했다. 등산, 답사, 취미, 여행 등 분야도 다양했다. 퇴직 교원들과 주 3회 탁구를 쳐 온건 압권이다. 교육 현장에 일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는 더없는 고마움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움직였다. 일을 핑계로 소홀했던 아내와의 시간도 늘려갔다. 자유인으로 5년을 열심히 살았다. 왜 회한이 없었겠는가?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의 모습에서 예전에 내가 보였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는 먹먹했다. 해를 더해가며 핸드폰의 이름들을 지워갈 때 기억들이 뭉텅이로 사라졌다. 내공은 쌓지 못하고 내려놓지도 않았다. 많이 아는 체한 날들이 부끄러웠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거울을 보며 마음속 근력까지도 부족함을 알았다. 이런 빈틈은 이미 오래 전에 예정되었는데 인정하기 싫었다. 문득, 빙하기라는 생각을 하니 섬뜩했다.

가득 채워질 내일의 자화상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을 곁들이니 폼도 나고 재미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과 발로 움직이니 길이 보이는 듯 했다. 사람과 자연과 풍경에 시선을 돌리니 쓸거리도 늘어났다. 눈여겨보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3년을 계속하니 작은 기억들은 나의 사초가 되어갔다. 조금 더 모으면 좋은 그 무엇이 될 것 같았다. 오늘이 지루하지 않았고 내일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지인들과 의기투합해 미대륙 횡단이라는 ‘로드 트립’ 계획을 세웠다. 아메리카 대륙의 산맥과 강, 사막과 도시, 대평원과 국립공원을 자동차로 달릴 것이다. 내 심장이 시키는 최초의 일이니 근사한 스토리가 엮어질 것이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혁명을 꿈꾸는 것이다. 희망을 만드니 설레고 기대가 생긴다. 미친 계획이 성공하는 가을이 오면 ‘나의 국경일’을 정하겠다.

이기소

전) 인천함박초. 청량초 교장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원인사과장

인천광역시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이기소 인천광역시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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