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출항한 근대 한국이민의 역사
"하와이에 흩날린 민들레 홀씨"선표(船票)를 팔았던 제물포개항장의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 인천지점. 사진 아래쪽 나무들이 세로로 늘어선 곳이 개항장시절의 석축잔교가 놓인 부두였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솜옷 자락을 후벼 파던 제물포 개항장의 석축 잔교(棧橋). 20세기 첫 번째 공식 국제이민을 떠나는 121명 동포의 손에는 대한제국 수민원(綬民院)이 발급한 여권 ‘집조(執照)’가 꼭 쥐어져 있었다. 배달민족 ‘민들레 홀씨’는 월미도에 정박해있던 일본 화객선(貨客船) 현해환(玄海丸)에 올랐다. 이틀을 항해한 끝에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長崎) 항에 도착했다. 신체검사에 102명이 통과했고 그 가운데 인천 출신은 86명이었다. 예방접종을 마친 이민자들은 1902년 세밑을 코앞에 두고 4,200톤급 미국화 객선 갤릭(S. S. Gaelic)호에 올랐다. 태평양에서 1903년 새해 아침을 맞았고 꼬박 2주일간을 항해한 끝에 1월 13일, 갤릭호는 마침내 하와이제도 오하우(Ohau)섬 호놀룰루에 닻을 내렸다.
호놀룰루에서 입국절차를 마친 동포들은 농장 매니저를 따라 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수입은 월 15달러. 처음에는 타국 노동 자들과 합숙했지만, 한국인 숫자가 늘어나자 농장측이 한인만 의 독립부락을 마련해주었다. 한국에 보낼 편지는 서울의 동서 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로 보냈고 거기 서 한국 내 우편망을 통해 배달이 됐다.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이민자 송 출의 법적 기반이 됐지만, 미국이 필요에 의해 급히 이민자를 모집한 모양새였다. 하와이는 1900년에 미국의 50번째 주로 복속됐지만, 그 훨씬 이전인 1830년대부터 세계열강의 묵인 아래 미국인 사탕수수농장주가 ‘꽉 잡고’ 있었다. 설탕은 15 세기 이후 서구인들의 최고인기 향신료였고 하와이는 미국본 토에 설탕을 공급하는 젖줄 노릇을 했다.
초창기 사탕수수농장은 하와이 원주민을 고용했다. 농장 규 모가 커지자 1851년에 중국인, 1868년에는 일본인 노동이민 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인 숫자가 늘면서 기득권을 유 지하기 위한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고, 골치를 썩이던 농장주 들은 일본인 견제를 위해 한국인 이민이 필요했고 급기야 한 국주재 미국대사에게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902년 봄 서울의 미국공사 앨런(Horace Allen)이 대한제 국 고종황제를 만나 하와이이민 송출을 적극적으로 설득했 다. 고종은 11월 15일 미국인 데슬러(D. W. Deshler)에게 이 민자 모집과 송출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다. 그다음 날엔 궁내부(宮內府)의 여권발급 담당 수민원(綬民院)을 신설한다 는 칙령도 내렸다.
사업가 데슬라의 수완이 남달랐다. 우선 동서개발회사 (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설립해 이민업무 를 총괄하고 신의주와 평양, 서울, 인천, 부산 등 전국 11개 도시에 모집사무소를 개설했다. 신문광고는 물론 전단지를 곳곳에 붙였다. 이민 수송용 대형기선 오하이오(Ohio)호도 구입했고, 은행도 설립해 한국 이민자의 배 삯과 미국 입국 시의 지참금(50달러)까지 대출해주었다.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데슬라회사의 오하이오를 타고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이민 신청자는 대부분은 도시 하층 노동자였다. 오백년 조선 사회가 몰락하고 세계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던 나라여서 그들 이 살기에는 꽤나 빡빡하고 암울했다. 거기에 가뭄과 홍수로 기근이 창궐했고 관리는 고혈을 짜내듯 국민을 수탈해갔다.이 땅의 민초에게 하와이이민 모집은 가뭄 속 단비에 다름 아 니었다.
1902년 캘릭호 처녀항해를 시작으로 1905년 8월 8일의 마지 막 이민선 몽골리아(Mongolia)가 호놀룰루 항에 도착할 때 까지, 약 3년간 64회에 걸쳐 7,415명의 한인 동포가 하와이로 건너갔다. 대부분 20대 남자(6,000여 명) 였고 그들이 대동한 600여 명의 여성(대부분 배우자)과 딸린 아이들이 500여 명 에 달했다.
하와이이민의 중단 사유에는 여러 요인이 얽혀있다. 그 가운데 서 ‘일본인의 훼방’은 결정적이었다. 절대다수였던 일본 노동자 가 기득권 상실을 우려해 필사적으로 미국인들을 꼬드긴 결과 였다. 1905년 11월 17일, 우리나라는 일본과 치욕의 을사늑약 (乙巳勒約)을 맺고 대한제국 외교권은 고스란히 일본에 넘겼다. 그 뒤 미국 농장주들은 한국 노동자 대신 필리핀 노동자를 받 아들였다.
인천시립박물관의 김동근 학예사는 “하와이 이민역사는 이미 5세대를 넘겼기 때문에, 이민 후손은 현지인 화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민 5세대면 한국인의 피(血)래야 고작 6.25%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제는 미국 시민으로 그들을 응원해주어야 할 때” 라고 덧붙인다.
한인 후손들의 하와이 활약상은 두드러진다. 하와이 대법원장이 나왔나 하면 경찰국장, 시장, 교육청장, 기업인, 예술인 등 각계 각층 지도자가 지금도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이민 50주년이 되 던 1952년에는 하와이 동포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갹출, 그 들이 출항했던 인천에 ‘한국의 MIT’ 설립을 추진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흔쾌히 동참하여 자신이 1914년에 설립한 하 와이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18만 달러를 보탰다. 대통령령으 로 1954년에 인하공과대학(현재의 인하대학교)가 설립됐다, 학 교이름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의 첫 자를 딴 것이었다.
우리 정부의 ‘2016년 재외 동포 현황’ 발표에 따르면 지구촌의 한민족 이민 후예는 744만 명에 달한다. 중국이 254만 명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미국(249만 명), 일본(81만 명)이 잇는다. 10 만 명이상의 동포가 사는 나라는 캐나다(24만 명), 우즈베키스 탄(18만 명), 호주(18만 명), 러시아(16만 명), 베트남(12만 명), 카 자흐스탄(10만 명) 이다.
밟아도, 밟혀도 새봄이면 대지를 뚫고 새싹을 틔우는 민들레의 홀씨처럼 한민족 이민후손은 지구촌 거의 모든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한 세기전 세계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이 ‘21세기 10대 강 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 7백만 민들레 홀씨의 역할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20세기 벽두 제물포항에서 시작된 하와이이민역사도 거기에 길고 굵은 뿌리를 박고 있다. 시인 천 병국씨는 2005년에 <북간도의 민들레> 라는 시를 지었다. 그 첫 단락은 이렇다.
"조선땅 좁은 길섶 발에 밟힌 민들레 홀씨 하나 두만강을 건너와서 북간도 황량한 벌에 군락으로 피어 있다. 망국민 서러운 한을 달래주던 그 꽃이다.."
(사)인천개항장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