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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차이나타운

"인천이 고향인 짜장면"

 

사진

사진2000년부터 인천시 중구가 차이나타운 복원사업을 벌이면서 북성동 버스정류장에 설치했던 조형물.
인천차이나타운이 짜장면의 고향이라는 ‘똑 부러진’ 메시지가 담겼다

짜장면의 사회학적 위치

세계 인스턴트 면류제조업 협회 ‘WINA’(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가 발표한 2018년 통계에는 한국의 1인당 라면소비량이 연간 74.6개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누가 뭐 래도 ‘라면천국’인 대한민국이다. 거기에 빗댈만한 또다른 의미 심장한 면류음식의 비공식통계가 하나 있다.

요식업전문가가 추산한 한국인의 1일 짜장면 소비는 600만 그 릇 이상이다. 전국의 24,000여 중국음식점에서 국민 8명 가운데 1명이 짜장면으로 하루 한끼를 때운다고 한다. 단순비교하면 라면은 1년에 37억 봉지, 짜장면은 22억 그릇을 판다. 숫자로만 따지면 라면의 판정승이다.
그러나 라면과 짜장면은 단순비교가 불가능하다. 라면 1봉지와 짜장면 1그릇의 질, 양적차이가 ‘넘사벽’이기 때문이다. 가격 면에서 짜장면은 라면의 7~8배에 달하고, 분량도 월등히 많다. 라면이 국민새참이나 간식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는 반면 짜장면은 5천년 한국역사를 지배해온 주식 쌀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인의 주식' 반열에 들기 때문이다.

사진인천시 중구 북성동의 차이나타운 입구.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차이나타운 조성에 앞장선 인천시가 대대적인 정비 사업에 나섰고, 그에 화답하듯 중국의 위해시(威海市)가 사진의 화려한 중화문을 설치, 인천시에 기증했다.

인천과 짜장면의 함수관계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큰 300만 인구의 인천, 그러나 이 거대 도시에는 5대(代)이상 눌러 살았노라하는 토박이가 드물다. 토 박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뿌리를 캐보면 2~3대에 걸친 내력이 대다수다. 그래서 그런지 인천을 대표하는 향토음식도 오랜 전 통을 담보했음직한 메뉴가 없다. 길어봐야 불과 수십 년 안쪽인 쫄면이니 닭강정, 물텀벙 등이 고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화 역사가 매우 짧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지금은 세계 최대급 국제공항이 있는 국제도시지만, 불과 130년 전만해도 초가집 수십 채에 마을사람이 수백 명에 불과한 인천 군(仁川郡) 다소면(多所面) 갯벌의 한적한 어촌마을이 바로 제 물포였기 때문이다.

다소면 앞바다에서 시작된 1882년 개항장 제물포. 청국과 일본 을 비롯한 각국의 조계지(租界地)가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 일대에 널려있었다. 그로부터 인천은 도시계획에 따른 근대 도시화가 시작됐다. 말하자면 고대와 중세를 건너뛰고, 19세기 말 서구문물 유입과 함께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도시가 인천이 었던 것이다. 그때 짜장면도 덩달아 인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모든 음식메뉴가 그러하듯, 짜장면의 고향이 인천이라는 사실을 확증할 만한 사료(史料)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장면이 인천에서 태어났다는 몇 가지 자료가 존재하며, 그런 사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어서 증언하는 노인 분들도 아직 살아계신다. 모든 사항을 종합해보면, 인천이 짜장면의 고향이라는 사실에는 이견(異見)이 없다. 단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것에는 몇 가지의 주장이 첨예하게 부닥친다.

사진인천시 중구 북성동의 차이나타운 입구.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차이나타운 조성에 앞장선 인천시가 대대적인 정비 사업에 나섰고, 그에 화답하듯 중국의 위해시(威海市)가 사진의 화려한 중화문을 설치, 인천시에 기증했다.

짜장면, 몇 가닥의 ‘인천기원설’

첫 번째 주장은 중국음식의 변용(變容)일 뿐이라는 것. 중국 면 류가 인천으로 건너와 단지 토착화(土着化)과정을 거쳤다는 설 명이다. 한국의 김치가 일본으로 건너가 설탕이 더해져 달작 지 근한 ‘기무치’로 토착화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베이징, 톈진 일대에는 우리의 자장면과 흡사한 ‘챠오장 멘’(炸酱面 혹은 炒醬麵)이란 메뉴가 옛날부터 존재해왔다. 짜장면처럼 야채와 돼지고기를 춘장에 볶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 라, 고기를 갈아서 중국식 갈색된장으로 볶아 고명을 만들었다 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중화요리의 현지화는 일본의 짬뽕(ちゃんぽん) 에서도 찾 아볼 수 있다.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전통요리인 탕로우스미엔 (湯肉絲麵)이 19세기 말 일본의 외국인 조계지(租界地) 가 있었 던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으로 건너가 토착화돼 만들어진 메뉴 였다는 설명이다.

두 번째의 인천짜장면 기원설은 ‘공화춘’에서 비롯된다. 1905년 현재의 자리에서 신축됐던 공화춘은 2011년에 복원, 지금은 인 천시 중구청이 운영하는 짜장면박물관 건물로 쓰여 ‘인천짜장 면의 메카’로 집중홍보 되는 곳이다.

공화춘의 짜장면 기원설에는 약간의 모순이 내재한다. 문을 열 당시 공화춘요리는 중국에서 건너온 사업가 등을 상대했기 때 문에 중국인 입맛에 맞는 오리지널 ‘청요리’였을 개연성이 크다. 개화기나 일제강점기 초기의 인천서민들 생활수준으로는 공화 춘 같은 고급 중국요리집 출입이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공화 춘이 한국 사람의 입맛에 맞는 짜장면을 처음 개발하여 인천시 민들에게 판매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공화춘의 ‘짜장면 원조설’은 최근에 불거진 한 송사(訟事)로 말 미암아 인천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기도 하다. 처음 공 화춘을 운영했던 화교 우희광씨는 영업 난으로 말미암아 1983 년에 폐업했다. 이 상호(商號)는 2002년 한 한국인이 상표등록 을 마쳐 2004년부터 인천차이나타운에서 제일 큰 중국음식점 을 개업하면서 상호로 내걸어 영업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보다 못한 우희광의 외손녀가 올해 9월 24일, 지금의 공화춘 대표를 상대로 ‘짜장면 원조집사칭’ 사기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를 했 다. 단지 짜장면 원조라는 명예를 되찾고 싶을 뿐이어서 손해배 상청구금액은 단돈 1천 원이라고 한다.

세 번째 인천짜장면 탄생배경은 ‘6·25한국전쟁 기원설’이다. 인천의 많은 토박이 노인들의 증언이 뒷받침되는 이론이기도 하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인천항을 ‘제2의 개항’으로 몰아갔다. 엄청난 규모의 연합군 상 륙작전이 감행됐던 곳이기도 하고 산더미 같은 전쟁물자가 연일 인천부두에 부려지면서 인천은 그때 유사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휴전 이후에도 한국경제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인천부두의 해상물동량 증가추세는 이어졌다.

인천항 부두에 노동자가 구름같이 몰렸다. 그들은 얼마 안되는 임금을 아끼려 허리띠를 졸랐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화교 들이 만들어낸 메뉴가 바로 짜장면이었다는 것이다. 값싼 야채와 돼지비계를 푸짐하게 썰어 넣고, 내용물이 뭔지 모르게 감추는 새까만 춘장으로 볶아 푸짐하게 삶아낸 면발 위에 얹어 싼값으로 부두노동자들을 배부르게 먹였다는 것.

거무죽죽한 독특한 색깔뿐만이 아니라 춘장의 감칠 맛까지 더해져 부두노동자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이 서울까지 번져 짜장면을 맛보러 경인선기차를 타고 일부러 인천을 찾는 서울시민까지 생겨났다. 1950년대 말 부터 중국음식점은 물론 한국 음식점에서도 짜장면메뉴를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가히 ‘전국구 한국음식’으로 짜장면이 자리 잡아갔다는 것이다. 마지막 짜장면 기원설은 인천화교와 인천시민의 절묘한 콜라보(Collaboration)가 만들어낸 ‘걸작’ 이었다는 주장이다.

 

사진인천차이나타운의 짜장면박물관. 옛 공화춘(共和春) 건물을 인천시가 2011년에 복원, 짜장면이 탄생한 발상지로 홍보하는 곳이다. 이 건물은 산동성(山東省) 지부(芝罘)출신의 중국화교 우희광(于希光)선생이 1905년에 신축하여 산동회관(山東會館)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소규모 무역상, 노동자(苦力) 등이 숙식했던 곳이었다. 1914년에는 공화춘(共和春)이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화교의 처절한 생존투쟁이 만들어낸 ‘짜장면’

인천의 화교사회는 1883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4년 인천 청국조계지 설정을 계기로 현재의 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 일대에서 삶의 토대를 마련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모진 세월을 한국인과 동고동락하면서 화교 역시 먹고살기 위한 투쟁에 온힘을 다 쏟았다.

2대에 걸친 화교집안 출신으로 인천차이나타운에서 만다복을 경영하는 서학보 대표가 증언하는 인천짜장면 기원설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는 “19세기 말 인천으로 건너온 우리 윗세대 화 교들은 자신이 몸담은 인천을 고향삼아 주로 음식점을 경영하며 억척같은 삶을 살아왔고, 한국인들의 주머니사정과 입맛에 맞는 중국음식을 개발해내야 화교들도 살아갈 수 있었기에 그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한국의 국민메뉴가 된 짜장면이었다”고 설명한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는 달리 한국의 화교는 경제활동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다. 화교집단의 경제적 실권행사를 안보적인 문제로 연관시켰던 한국정부는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 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기에 이르렀고 전 국민의 혼식장려 캠페인 때는 중국집의 쌀밥취식 금지령까지 내린바 있었다.

서 대표는 “온갖 규제를 감내하면서 까다롭기 그지없는 한국인 의 입맛을 철저히 반영하여 인천화교가 만들어낸 짜장면이어서 더욱 애착이 간다”며 “인천차이나타운을 들르는 많은 외국인들도 이구동성으로 짜장면 맛을 칭찬한다”고 웃는다.

글, 사진
손상익
(소설가, 언론학박사)

손상익 소설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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