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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성 (仁川城)

 


   

글 / 장  용 (방송인)   

인천광역시의회 홍보대사, (사)한국가위바위보협회 이사장   


 

  

조선시대에도 신도시와 원도심이 있었다. 1,000호가 모여 사는 큰 마을임에도 반듯하고 살만한 집 한 채 찾아 볼 수 없었던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의 민가 지역은 수도지만 명백한 원도심이었다.
울퉁불퉁한 언덕에 대충 땅을 고르고 다듬지도 않은 나무로 기둥을 세웠다. 수평 맞추는 건 고사하고 썩기 쉬운 새끼줄로 기둥과 들보를 엮어서 겨우 집틀을 만들었다. 흙 손도 
없이 그저 맨손으로 진흙을 바르다 보니 어느 부분이 두텁고 얇은지도 알 수 없는 벽은 시간이 지나면 구멍이 뚫려 찬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크게 짓는 건 고사하고 튼튼하게 지을 수도 없어서 작게 지어도 툭하면 집이 무너지곤 했다. 문에 틈이라도 생기면 개가 죽을 잘라 못으로 박아 놓았는데, 들락날락하면서 튀어나온 못에 옷이 걸려 찢기는 일이 잦았다. 구들장 역시 고르지 않으니 앉으면 몸이 기울고 누워 있으면 몸이 비뚤어졌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집이 작으니 일어서서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천정은 낮고, 누워도 다리를 쭉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성(城)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흙을 쌓아 짓는 토성(土城)의 부실함은 말할 것도 없고, 화강석으로 지은 석성(石城)도 돌로 만들어 튼튼할 것 같지만 그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밑부분의 돌이 빠지면 한순간에 무너지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나라와의 군신 관계로 1년에 서너 차례 사신을 보내는 굴욕적인 처지에 있었다. 어느 날 연행사(청나라의 도읍인 연경(지금의 북경)으로로 간 사신)로 간 박제가는 ‘벽돌’이란 것을 알게 된다. 중국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벽돌은 백성들의 수재나 바람의 피해를 막아 주고, 도둑의 침입 또는 물에 젖어 벽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해 주며, 건물이 기울어져 무너지는 걱정을 없애주는 ‘벽돌의 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귀국 후 박제가는 정조에게 상소를 올린다. 풍부한 학식과 늘 개혁을 염원하던 정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에게 건축을 맡긴다. 정약용의 치밀한 설계와 직접 발명한 거중기를 사용하여 동양의 웅대함과 서양적인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혼합된 수원의 화성(華城)은 이렇게 탄생됐다. 단순히 적의 침입을 막는 성곽의 기능 을 넘어 팔달산 아래는 한양 다음으로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명실 공히 조선시대 최초의 신도시로 거듭나게 되었고, 벽돌과 화강석을 섞어 아름답고 견고하게 완성된 화성(華城)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지금 우리에게 아름찬 뿌듯함을 주고 있다.
여기서 박제가가 보고 온 벽돌의 도입이 마치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 이전 백제의 무령왕릉 고분을 보면 벽돌로 지어진 전축 분(벽돌무 덤)이 이미 있었다. 당연히 벽돌로 건축할 수 있는 기술도 있었고 전통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술이 일반 백성의 집을 지을 때는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집이  허술하면  사는 게 고달프다. 여기저기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오면 그건 이미 집이라 볼 수 없다. 건축에 쓰인 못 하나, 돌덩이 하나, 인부 한 사람의 반나절 임금까지 정확하게 챙겨 주면서 지어진 화성(華城)처럼 인천이 열정과 따뜻함이 함께하는 도시였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한 사람의 시민도 귀하게 섬기고, 시민이 몰랐던 것을 찾아내야 한다. 시민이 불편한 점은 빨리 알 아내고, 모두가 쓸 수 있는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한다.  

인천광역시의회가 흙처럼 흩어진 시민의 의견들을 반듯하고 튼실한 벽돌로 만들어서 균형감 있고 아름다운 인천성(仁川城)이 될 수 있도록 힘써주길 바란다. 아울러 늘 다양한 과제로 쉼 없이 숙의하는 모습에 감사와 열렬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당시 일화 를 하나 소개한다. 많은 신하가 수원 화성을 짓는 것에 반대가 심했다. 그중에 한 신하가 “왜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성을 험악하게 짓지 않고 아름답게 짓습니까?”라고 불만을 토로하자, 정조의 한마디가 지금도 가슴에 울림으로 남는다.
“어리석은 신하들아!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하늘로도 가고 바다로도 갈 수 있는 인천, 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아름다운 수평선처럼 세계와 통하는 근사한 인천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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