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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빛에 담긴 불굴의 의지

"유희강"

유희강 이미지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아래 빛나는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2022년 <인천애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을 찾아 떠난다.
두 번째 순서는 인천 근현대 서예가의 거장 검여 유희강 선생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풍을 구축하다

우리나라 근현대 서예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그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에 두루 능했다. 특히 전서와 행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는데, 따라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만들어냈다.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먹을 갈고, 그 먹물을 하룻밤 묵혀 사용했다. 그래서 먹빛이 깊고 묵직하면서 영롱했다고 한다.
유희강은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부평군 서곶면 시천리(현 인천시 서구 시천동)에서 태어나 집안 전통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서예의 기초를 익히며 성장했다. 이후 명륜전문학원을 졸업하고 1983년부터 중국 북경에서 서화와 금석학, 서양화를 연구했다.
귀국한 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출품해 모두 입선했으며, 제6회 국전까지 입선과 특선을 반복하며 전국 최고의 서예가임을 증명했다. 그 외에도 1954년부터 7년 동안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하고 인천시립도서관장, 인천서예가협회장 등 인천의 문화예술단체에서 중책을 맡으며 활동했다.

왼손으로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내다

평탄했던 그의 일상에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왔다. 1968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었다. 수원 영화동 농가에서 5개월간 요양치료를 했으나 오른손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붓을 놓았을 상황임에도 그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유희강이 쓰러진지 10개월이 지난 1969년 6월, 서울국립공보관에서 열린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왼손으로 쓴 그의 서예 작품이 출품됐다. 서예는 필획에 움직임에 따라 글씨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손이 바뀌면 본래의 글씨 수준을 이뤄내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새롭게 좌수서(左手書)의 세계를 열었다.
상형문자를 주로 사용하며 좌수서의 경지를 한층 높인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서예를 멈추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좌수서는 서예 본질의 추구만이 남아 더욱 격조가 높으며 검여 유희강 선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한 불굴의 예술가라 평했다

플레이스막 전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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