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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유의 미를 찾은 눈빛

"고유섭"

고유섭 이미지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아래 빛나는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2022년 <인천애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을 찾아 떠난다.
세 번째 순서는 최초로 한국 미술작품들을 연구하고 분석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한국미술사학의 기틀을 다지다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가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은 일제강점기에 미술사와 미학을 학문화한 학자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한국미술의 역사를 올바르게 규명하기 위해 그는 일생을 바쳐 수많은 한국 미술 작품들을 연구하고 정리했다.
고유섭은 1925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미학·미술사를 전공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학교가 문을 닫기까지 조선인으로는 유일한 미술사 전공자였다. 당시 담임교수가 그에게 진로를 변경하라고 충고했을 만큼 미학·미술사의 길은 고단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시각과 관점에서 한국 미술의 본질을 살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국미술사학의 기초를 다졌다.
대학 졸업 후 미학연구실 조수로 근무하던 고유섭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물과 유적을 답사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에 보관되어 있던 규장각 소장 문집을 비롯해 옛 문헌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하면서 우리 미술사의 뼈대가 될 글들을 써내기 시작했다.

한국미의 정체성을 탐구하다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적 계획’, ‘무관심성’, ‘단아함’ 등 우리 전통 미술을 설명하는 용어 대부분 고유섭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우리 예술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미로 해석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의 개념은 지금까지 한국미술을 바라보는 핵심 단어로 남아있다.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한국의 불교 조각과 탑, 고구려 미술 등을 연구했다. 특히 1933년 개성박물관 관장에 부임하면서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 연구의 폭이 더 넓어졌다. 10여 년간 150여 편의 저술을 통해 한국미술사학 연구를 개척했다. 또한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출강해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문화재 연구에 뜻을 둔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앞장섰다.
고유섭은 소원이었던 ‘조선미술사’의 집필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1944년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그는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척박했던 한국미술사가의 길을 밝히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인천인물 사전

고유섭 사진

고유섭(미술사가)

  • 1905 인천 용동에서 출생
  • 1918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
  • 1925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192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입학
  • 1930 경성제국대학 졸업
  • 1933 개성박물관장 취임
  • 1944 지병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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