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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한 검사

"만오 홍진(洪震)"

일제에 저항한 검사 만오 홍진(洪震)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위에 빛나는 숨겨진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인천愛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들을 찾아 떠난다.
이번 호는 법조인 출신으로 인천에 본거지를 두고 독립운동을 한 ‘만오 홍진’을 소개한다.

법조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다

한성정부 국민대회 취지서한성정부 국민대회 취지서 (출처_독립기념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개항된 후, 조선에는 많은 문물과 학문이 유입됐다. 가난하지만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홍진은 근대 문물 중 법학 공부에 빠졌고 학문의 길에 매진했다. 1898년 그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대 전신인 ‘대한제국 법관양성소’를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 주사와 평리원 판사를 거쳐 1906년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됐고, 사법권까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됐다. 위기에 놓인 조선을 바라보던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이 자리 잡았다. 여느 때처럼 일제 침략에 항거하던 의병의 죄를 감해 기소하던 그는 법부로부터 견책을 받게 되고, 1908년 검사직을 사직한다. 이후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가 되어 검사로서 하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법적 지원을 실시했다.

임시정부 설립에

큰 공을 세우다

본격적으로 홍진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3.1운동부터다. 당시 조선 곳곳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대한독립만세’ 외침의 물결이 번지고 있었다. 홍진은 이 물결에 적극 가담했고, 1914년 4월 2일 그의 주도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리게 된다. 그는 각 대표자가 모인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발표했는데, 이 장소가 인천만국공원으로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같은 시기 중국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소식을 들은 홍진은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임시의정원 의장과 정부 수반인 국무령을 맡아 민주공화정과 의회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광복 후에는 인천으로 돌아와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서 통일정부 수립에 애썼으며, 만 70세로 가문의 선영이 있는 문학산 자락에 잠들었다.
묘비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있었으나 1984년 홍진의 묘소가 국립묘지로 이장됨에 따라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민족을 위해 불꽃처럼 독립운동에 힘쓴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인천인물 사전

홍진 사진

홍진

  • 1877 서울 출생
  • 1904 법관양성소 졸업
  • 1908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직 의원면관(사직)
  • 1919 한성임시정부 조직
  • 1926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 1946 비상국민회의 창립의장
  •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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