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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혁성

독립만세를 외치다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아래

빛나는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2022년 <인천애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을 찾아 떠난다.
첫 번째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故심혁성 독립운동가다.

 


 

황어장터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 
1919년 3월 24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날.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재 인천광역시 계양구 장기동)에서 당시 대표 우시장이었던 황어장이 열렸다. 오후 2시가 되자 장터에 모여든 군중 속 한 청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를 따라 하나둘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인천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심혁성 지사로 지역의 천도교인, 기독교인, 농민 등 주민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렸다. 

그는 이들을 규합해 나갔으며 만세운동의 장소를 황어장터로 정했다. 장터는 일본의 감시에도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 경찰도 이를 경계했기에  만세운동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심혁성 지사는 붙잡혔다. 이를 본 수백명의 사람이 그를 놔주라고 시위했고, 이 과정에서 이은선 열사가 칼에 맞아 숨졌다. 그가 잡힌 이후에도 마을 주민은 친일파의 집과 계양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평생을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쓰다
이 사건으로 심혁성 지사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10일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다시 황어장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논과 밭, 집을 팔아 장만한 생필품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가족과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약초를 캐다 팔며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1년 7월 북만주 흑룡강성으로 망명하여 신민부에 가담했으며, 1927년 함경도에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다.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와 강원도 영월 등을 다니며 독립채권을 매입하여 군자금을 모았다. 
광복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심혁성 지사는 1958년 12월 14일 인천광역시 북구 백석동(현 서구 백석동)에서 타계했다. 황어장터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또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잊지 않고, 그 정신을 전하기 위해 황어장이 열리던 자리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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