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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등불을 밝힌 여성 교육자

"김란사 (金蘭史)"

김란사

세상을 떠나서도 인천이라는 이름 위에 빛나는 숨겨진 인물들이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역사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람들.
<인천愛의회>에서는 그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천의 인물들을 찾아 떠난다.
이번 호는 여성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며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 ‘김란사’ 지사를 소개한다.

시대를 앞선

교육을 이끌어가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기숙사에 앉아 있는 김란사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생이던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고 말했던 스승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문학사이자 여성 계몽교육에 앞장선 김란사 지사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녀가 인천에 정착한 시기는 1893년 인천에서 감리로 활동하던 하상기와 결혼하면서다. 그녀의 남편은 조선 말기 인천 개항장의 사법과 행정, 국제 업무를 총괄하던 고위 관료였다. 그는 아내가 신문물을 배우고 국내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왔다.
그녀는 결혼한 뒤 당시 유일한 여성 근대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방문했다. 그러나 금혼 학칙이 있던 이화학당은 기혼자에 딸까지 있던 그녀의 입학을 거절했다. 포기하지 않은 그녀는 이화학당의 교장인 룰루 프라이에게 찾아갔다. 하인이 든 등불을 끈 그녀는 “우리의 상황이 캄캄하기가 이 등불이 꺼진 것과 같은데, 어머니가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호소했고, 마침내 입학하게 된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김란사 지사는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98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 입학했으며,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이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긴 유학 생활을 마친 그녀는 귀국한 뒤 1907년부터 이화학당 교사이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했다. 1910년 9월에는 이화학당 대학과가 개설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 또한 상동교회 영어학교에서 기혼 여성들을 가르쳤으며, 진명과 숙명 학교 설립의 자문 역할을 도맡았다. 1916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총회에 참석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독립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1919년 그녀는 고종의 밀서를 품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에 들렀다. 동포들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갑작스럽게 병원으로 이송돼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정확한 사인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독살당했다는 설이 떠돌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국가와 민족의 등불이 되어 암울한 상황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그녀의 공훈을 기리며 1995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인천인물 사전

김란사 사진

김란사

  • 1872 평양 안주 출생
  • 1893 하상기와 결혼
  • 1894 이화학당 입학
  • 1897 미국으로 유학
  • 1906 문학사 학위 취득
  • 1907 이화학당 재직
  • 1919 중국에서 급사
  • 1995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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