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창영(昌榮) 초등학교에 가다창영초등학교의 옛 본관. 1924년에 지어진 연건평 560평짜리 2층 콘크리트 벽돌건물이다. 당시엔 인천의 ‘멋쟁이 건물’로 칭송이 자자했다. 인천시가 유형 문화재 16호로 지정하여 최근 내부 개보수를 마친 뒤 학생교육용 ‘문화재관’ 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이념 가운데 하나인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 정부 수립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이끌었던 저 유명한 인도의 비폭력저항운동도, 맨손 으로 일제에 항거한 3.1독립운동이 원형(原型)이라는 평가를 받 는다. 3.1운동은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 근현대사를 통 털어 첫 손 꼽힐만한 ‘근대시민저항운동’의 전범(典範)이다. 만세운동을 촉발한 계기는 명확했다. 세계 식민지경 영사상 전례가 없는 포악한 일제의 만행이었다. 쇠붙 이를 매단 쇠가죽채찍으로 식민지 한국인을 피범벅으 로 만드는 즉결 처분권을 가졌던 일제의 헌병(憲兵)통 치. 그 잔인함이 10년째 쌓였던 1919년, 우리 민족은 일제히 분노를 터뜨려“대한독립만세!”함성을 뿜었다. 그것이 3.1운동이었다. 그날 오후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서는 최 남선이 짓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 선언서를 한용운스님이 낭독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 던 민족대표 29명은 태화관측에서 제보하여 출동한 일제경찰부대 80여명에 의해 포박, 연행됐다. 그때 종로 탑골공원에서는 오전수업을 마친 서울의 중고등학생 4~5천명이 집결해 있었다. 오후 2시경 단 상에 오른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학생들 은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메마른 들판의 들불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활 타들어갔다. 한국학중앙연구 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19년 3월에 서 4월까지, 전국 212개소에서 약110만 명의 대한국 인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집계한다. 1919년 3월에서 4월까지 두 달간 1,214회의 국내시 위가 벌어졌고 성난 시위대는 과잉 진압의 원흉 일제 경찰에 저항하며 관공서 778곳을 습격했다. 그 과정 에서 일제는 더욱 흉포하고 무자비한 살상을 저질렀다. 7,500명이상이 사망하고 16,000여명이 부상당했다. 만세와 시위혐의로 구속된 사람만 47,000명에 달했다.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약 1,000만 명 내외였음을 감안 하면 가히‘대한사람 총궐기’라 할 만 했다.
1924년 준공당시의 창영공립보통학교 본관모습. 지금은 ‘자랑스런 창영역사’를 전수하는 문화재관(文化財館)으로 활용하고 있다.
3.1운동의 뼈대를 세웠던 이는 당대의 종교계를 포함 한 사계의 어른이었으되 시위에 나눠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새 필경(筆耕)하고 그렸던 주인공은 대부 분은 보통학교, 중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국내뿐만 아 니라 침략원흉의 소굴 일본 도쿄에서도 한국유학생들 이 주도하여“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다. 심지 끝에 매달린 등불 같던 대한민국의 명운(命運)을 다시금 환한 불꽃송이로 지폈던 주인공, 이 땅의 학생 들은 만세시위에 앞장 서 악랄한 일본경찰의 총과 칼 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그리하여 쏟아진 선홍빛 핏물 은 이 땅 위에 꽃잎처럼 뿌려졌다. 한국나이 18살이던 이화학당 재학생 유관순(柳寬順) 열사는 동료 학우들과 함께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 정오에 충남 천안시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군중들에 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는데, 시위에 참 여했던 열사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제경찰의 흉탄에 세상 을 뜨셨다. 아우내 시위현장에서 체포된 유관순열사는 공주감옥으로 이송됐는데 그곳 감옥에서 3살 터울의 오빠 유우석(柳愚 錫)을 상봉했다. 유우석열사 역시 공주 영명학교 재학생 으로 3월 12과 15일 두 차례에 걸친 공주만세시위를 주도 한 혐의로 공주감옥에 갇혀있었다.
구 본관건물을 배경으로 1969년 창영초등학교 교직원들이 기념 촬영했다.
졸업 앨범에서 발췌한 사진.
인천의 3.1운동 역시 창영(昌營)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 했다. 창영초등학교는 일제가 정미7조약을 내세워 한국 땅 강탈야욕을 본격화하던 1907년 5월, 현재의 인천광역 시 동구 쇠뿔고개(牛角峴; 현재 배다리인근) 근처에서 개 교한 인천최초의 공립보통학교였다. 당시 보통학교 재학 생은 오늘날의 초중고를 합친 것 같은, 10살 전후에서 20대 까지였다. 1919년 3월 6일, 창영공립보통학교 재학생이던 김명진 등 고학년 학생들은 학교와 인천경찰서 정보과로 연결된 전화선을 끊고 인천의 각급학교와 긴밀히 협조, 동맹휴학 을 주도하고 등 연합 만세운동 시위를 이끌었다. 창영보통학교에서 시작된 인천의 3.1운동 열기는 중구 지 역에서 점점 세력을 확산, 부평 지역을 거쳐 인천시 전역 으로 확산돼갔다. 거기에 더해 바다건너 강화도와 교동 도, 용유도(현재의 인천공항자리)와 덕적도까지 만세함성 을 잇대었다. 3월 6일 창영보통학교에서 시작된 시위 다음날인 3월 7일엔 강화군 부내면 장터에서 만세소리가 터졌다. 시위 를 주도한 유봉진 선생이 ‘강화군민에게’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참석한 김포군민을 포함한 24,000여 강화군민 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9일엔 만국공 원(현재의 자유공원)에서 청년·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만 세시위가 벌어졌다. 3월 12일 강화군 강화공립보통학교 시위를 시작으로 3월 18일엔 강화읍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강화본섬의 만세 운동은 21일부터 24일까지 교동도까지 잇대 만세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3월 23일에는 용유도(현재의 인천공항자 리)에서 조명원 선생 등 11분 의사가 혈성단을 조직했고 3월 28일 강화도 관청리 광장에 운집한 강화주민과 함께 뜨거운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4일부터 이틀간 부평 계양구 장기동 소재의 황 어(黃魚)장터에서도 6백여 명의 부평주민이 독립만세 를 외쳤다. 만세시위는 3월 27일 미추홀구 주안동일 대와 관교동(당시엔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까지 잇대 며 우레 함성으로 번져나갔다. 4월에도 만세 열기가 이어졌다. 9일에는 덕적도 진리 에서 임용우 선생이 이끈 덕적주민의 만세운동이 벌 어졌다. 임용우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 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수형 몇 달 만에 옥사하 고 말았다. 강재구의 살신성인 덕분에 단 한명의 중대원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 강재구소령의 산화소식은 온 국민이 칭송했고 스물여덟 꽃다운 장교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올해로 개교 112년을 맞는 인천창영초등학교이 배 출한 졸업생은 4만여 명에 달한다. 콩 심은데 콩 난다 했던가.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의 3.1운동을 주도한 김 명진 대선배 뒤를 이어 구국 헌신한 인사를 많이 배출 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 학교 40회 졸업생인 고 강재 구소령의 살신성인은 또 하나의 뭉클한 감동으로 다 (위) 1924년 준공당시의 창영공립보통학교 본관모습. 지금은 ‘자랑스런 창영역사’를 전수하는 문화재관(文化財館)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래) 구 본관건물을 배경으로 1969년 창영초등학교 교직원들이 기념 촬영했다. 졸업 앨범에서 발췌한 사진. 가선다. 1937년 인천에서 태어난 강재구는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한국군 월남파병이 확정되 자 출병하는 육군 맹호부대(현재의 수도기계화사단) 의 제1연대 제10중대장을 맡았다. 파월 전 훈련과정의 하나로 1965년 10월 4일, 강재구 중대는 강원도 홍천군의 한 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했다. 그때 한 이등병이 안전핀 뽑은 수류 탄을 몸 뒤쪽 위로 젖히던 순간, 아차 실수하여 땅바닥 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뒤쪽에 정렬해있던 중대원 쪽으로 수류탄이 떼굴떼굴 굴러가자 중대장 강재구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수 류탄을 덮쳤다. 수류탄은 굉음과 함께 폭발, 갈기갈기 찢겨진 그의 몸은 허공으로 날렸다. 강재구의 살신성 인 덕분에 단 한명의 중대원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당시 강재구소령의 산화소식은 온 국민이 칭송했고 스물여덟 꽃다운 장교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 이야기는 1966년 당대최고 영화배우 신성일이 주 연을 맡아 ‘소령 강재구’로 영화화돼 수많은 애국관람 객이 눈물을 삼키며 지켜봤다.
(사)인천개항장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