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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이수봉과 이중화, 이억근과 전정윤의
엇갈린 조국, 엇갈린 삶"

이수봉과 이중화, 이억근과 전정윤의 엇갈린 조국, 엇갈린 삶

  • 1930년 체포 당시 이수봉 지사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사진
  • (오른쪽) 1933년 수감 당시 이억근 지사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사진

1949년 4월 19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기도 인 천조사부의 이성민(李性玟) 조사관과 일제강점기 인천 경찰서의 고등계형사였던 피의자 이중화(李重華)가 마 주 앉았다. 조사관이 물었다. “피의자는 약 이십년 전에 이수봉(李 壽奉)을 체포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 대답은 “네. 체포 한 사실이 있습니다”. 질문이 이어진다. “고문한 기억이 전연 안 나는가.”, “전연 기억되지 않습니다”. 추궁이 이 어지자 마지못해 한 대답은 앞니가 부러지도록까지 고문 한 사실은 없는데, 일본인 이마미야(今宮) 형사가 했는지 는 모르겠다였다. 이보다 앞선 1949년 3월 24일 당시 인천자유노조 수송 부장으로 송월동 3가 16번지에 살고 있던 이수봉 지사는 증인으로 반민특위의 조사에 출석하여 삼일절 11주년 기념일에 「민족에 격함」이라는 유인물 살포 협의로 이중 화에게 체포당한 경과를 설명했다. 이어서 “이중화 형사가 소생의 양 팔을 뒤로 돌려 묶고 무릎을 꿇게 하고 이중화 형사와 일본인 이마미야 형사 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검도용 죽도와 목도로서 전신을 난타하고 구둣발길로 전신을 수없이 세게 차고 손으로 양 뺨을 무수히 구타하였는데 이것을 11일간에 매일 2, 3씩 당하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 드」에 따르면 이수봉지사는 1905년 2월 7일 생으로 1930년 3월 1일 서울역에서 인천청년동맹 및 노동조합 간부 김점권(金点權), 인천공립학교 이두옥(李斗玉), 노 동조합원 문안식(安文植), 신간회원 유창호(劉昌浩)와 함 께 민족의 독립을 바라는 격문을 뿌리다가 체포되었다.

고문당한 사람은 앞니가 부러졌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도 구체적으로 고문상황을 기억하여 증언하는 데 비해 고문한 사 람은 기억이 없거나 일본인 형사가 했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이 장면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독립지사의 이후 삶을 상징적으 로 보여준다. 이중화는 실제 징역 1년형을 구형받았으나 최종적 으로 공민권 정지 4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서울에서 토목건축업 회사인 태화실업을 경영하는 등 평온한 노후를 보냈다. 이수봉 지사의 행적은 알려진 게 없다. 아무도 그이의 행적을 찾 으려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인천 의 독립지사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 장면은 이어진다. 같은 해 4월 27일 유동 23번지에 살던 이억 근(李億根) 지사가 역시 반민특위 인천조사부에 증인으로 출석 했다. 이 지사는 일제 경찰 전정윤(全正允)에 대해 “약 40일간 유 치를 당하고 전정윤, 권오연, 송이원 3인에게 비행 고문, 물먹이 고문을 당하다 송국되어 결국 6개월 언도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며 “그 당시 전정윤, 권오연, 송이원은 인천 청년이 가리 켜 「세마리의 까마귀」라고까지 불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아 울러 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증인 신문에 스스로 나서지 않았 느냐는 물음에 “소생은 지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상당한 고통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심지어는 소생의 부친까지 영향이 미쳐 그 당시 소생의 집은 파산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오늘날 신생국가 수립과 동시 그들 자신이 자진 죄과를 자백할 것을 충심 바라는 나머지 금일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억근 지사는 1914년 7월 생으로 자신의 진술과 「일제감시대 상 인물카드」의 기록을 볼 때 평양사범학교 재학 중의 공산주의 청년회 사건과 인천독서회 사건으로 두 차례 체포 수감된 독립 투사였다. 독립운동의 결과 집안이 파산했다는 이 지사의 진술 속에는 해방 이후에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의 죄상과 독립투사 의 엇갈린 삶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자료에서 인천 관련 사건과 인물을 검색해 보면 낯선 인물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고, 그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제 경찰의 사찰 문서, 재판 기록도 상 당한 양에 이르는 걸 알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해야 한다는 당위가 넘친다. 하 지만 인천의 3.1운동과 그 이후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과 행 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적다면 의미는 퇴색된다. ‘기억’이 없는 ‘기념’의 울림이 어떻게 클 수 있겠는가! 인천에서는 오히려 3.1운동 100주년을 단순히 ‘기념’하는 행사 로서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조 사하는 계기로 삼는 게 어떨까? 인천광역시와 시의회에서 주도 적으로 장기계획을 입안하여 인천의 독립지사를 조사하는 기획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공모를 통해 전문성 있는 연구자들의 공동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면, 올해보다는 내년에, 내년보다는 후년 에 3.1운동과 인천의 독립운동은 더 분명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엇갈린 조국을 선택한 이들이 있었고, 우리는 여 전히 그 엇갈림을 정정당당하게 바로잡지 못했다. 일본을 선택 한 이들은 잠깐의 고초 끝에 자유를 얻어 영화를 누렸고, 조선의 독립을 선택한 이들은 긴 좌절과 잠깐의 희망 뒤에 자의든, 타의 든 다시금 깊은 심연의 늪에 빠져버렸다. 어제는 오늘의 바탕이고, 오늘은 내일의 근거가 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자기의 위치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지사들의 삶과 의지를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아 미래의 우리에게 전해줄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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