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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시공하고 조선총독부가 준공한

"수도국산 인천수돗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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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수도국산을 아십니까

수도권 1호선 전철 동인천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오른쪽 1시 방향에 나지막한 산동네가 보인다. 그 산이 바로 수도국산 (水道局山)으로 해발고도가 56m에 불과하여 ‘언덕마루’라 불러야 더 어울릴성싶다. 전철 출구를 나와 언덕배기 좁은 길 500여 m를 오르면, 송현 근린공원이란 팻말과 함께 달동네박물관이 나타난다. 수도국산 자락이 걸치고 있는 송현, 송림동 일대는 개항장 때부터 외국인이 많이 살던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난민 등으로 달동네가 형성되면서 인천에서 가장 낡은 구도심(舊都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수도국산은 인천에만 있는 지명이 아니다. 전국 대도시의 50~100m 내외 낮은 산자락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반 도시 근대화와 함께 수돗물 배수지가 그곳에 위치하면서 붙어진 지명이기 때문이다. 서울 수도국산(성동 구 금호동), 천안의 수도산(동남구 수조산), 대전의 수도산(중 구 대흥동) 등이 대표적이다. 수돗물 배수지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간단하다. 펌프를 돌려 배수지로 물을 퍼올려서 가둔 뒤, 각 가정의 수도꼭지까지는 중력의 법칙 즉 자연낙하로 흘러가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가 산속 맑은 계곡물을 경사진 고가교 물길 (水路)을 따라 저지대 마을까지 연결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달동네박물관 바로 위쪽에 수도국산의 주인공 송현배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110년 전 서울 노량진에서 정화된 한강물을 끌어와 인천 수도꼭지에서 맑은 물을 콸콸 쏟아내던 곳이다.

인천수돗물, 어떻게 시작됐나

근대도시 조성의 기반이 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가 상수도다. 인천은 지리적으로 급수환경이 취약했다. 해안 쪽에 몰린 시민 거주 지역은 갯벌지천이어서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오기 일쑤 였고, 개울물을 길어오려도 간조(썰물)와 만조(밀물) 수위차가 최고 9m에 이르러, 하루 두 번씩 바닷물이 역류해댔다. 인천사람을 ‘짠물’이라 불렀던 역사적 뿌리가 거기서 비롯됐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인천의 도시 급수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제물포 개항장 거류 외국인들이었다. 개항 이전엔 수백 명 주민에 불과 하던 인천사람이 1882년 개항과 함께 내외국인 숫자가 급증했다. 개항장 초기에 집계된 인구는 16,463명으로, 내국인 9,900명, 일본인과 청국인이 각각 4,200명과 2,300명 그리고 서양인 63명이었다. 자유공원 둔덕에 최초의 외국거류민 조계지가 설치됐는데 당시 식수는 웃터골(옛 제물포고등학교 자리) 우물에서 끌어와 근근이 해결했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청수(靑水) 공급은 1889년에야 가능했다. 북성동파출소(현 차이나타운 입구) 인근에 커다란 우물 3개에서 하루 5백 톤의 물을 퍼올려 선박에 공급했다고 한다. 1905년 조선통감부가 설치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인천 거류 일본인이 12,700명으로 폭증했다. 그들은 개항장 조계지를 벗어나 지금의 송현동 일대까지 진출했다. 상수도 설치문제가 대두된 시점이었다. 1905년 2월, 재인천일본인거류민단장 토미타 타카시(富田耕 司)가 주도하여 일본 영사, 상수도 설계 전문 공학박사 등 40여 명이 참여한 임시급수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회는 이나다 카츠히코(稻田勝彦) 등에게 설치 타당성조사를 맡겼고 이어서 상수도설계까지 완성했다. 공사개요는 6㎞ 거리의 문학산 계곡에 빗물저수지(雨水貯水池)를 만들고, 1인 1일 10갤런(약 38리터)의 수돗물 공급을 전제로 14,000명분을 급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학산 계곡의 저수량이 예상 치에 턱없이 모자라 착공도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한강물을 끌어오는 특단의 조치 - 송현배수지

문학산 계곡 상수원 설치가 유야무야된 이후, 마치 복음처럼 “서울의 한강물을 끌어온다”는 소식이 인천에 전해졌다. 그 자초지종은 이랬다. 우리나라의 상수도 시설공사는 1903년 대한제국정부 탁지부(度支部; 국가 재정담당) 산하의 수도국이 관장하면서 시작됐다. 그해 12월 9일 미국인 사업가 두 명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상수도 부설 경영의 특허를 받았고 이 특허권은 1905년 8월, 영국인이 설립한 조선수도회사(Korea Waterworks Company)에 양도돼 한강의 뚝섬에 수원지 조성 공사를 시작 했다.1905년 8월에는 대한제국정부 내무부가 위촉한 일본인 건축기사 나카지마(中島)가 뚝섬수원지 외 노량진 상수도 수원지를 건설하여 서울 용산과 인천의 수돗물 공급한다는 기본설계를 마쳤다. 1906년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상수도관 매립 공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대한제국정부의 재정이 바닥나 좌초할 위기에 직면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선통감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 文) 통감이 중재하여 일본흥업(日本興業)이 대한제국정부의 관세 수입을 담보로 당시 돈 1천만 원을 대출해주었다. 이 돈으로 1906년 11월, 대한제국정부는 인천까지의 상수도 공사를 착공 할 수 있었다. 노량진 한강 상류 쪽 115칸(217m) 떨어진 곳에 우선 물을 빨아들이는 취수탑을 설치했다. 그 물은 노량진 강변에 파놓은 21,000㎡(6,350평) 규모의 저수지에 담겼다. 이 물은 그 아래의 침전지(沈澱池) 3곳과 여과지(濾過池) 4곳을 거치게 하는 등 수질정화에 신경을 썼다. 정화를 마친 한강물만 직경 20인치 (50.8cm) 주철관(鑄鐵管; 쇳물을 틀에 부어 찍어냄) 32.62㎞의 물길로 인천 수도국산 아래까지 흘려보냈다. 2019년 5월말, 인천 서구의 수돗물에서 적수(빨간 녹물)가 나와 인천시민들이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다. 적수의 원인은 낡은 주철 수도관에 낀 붉은 녹 때문이었다. 110년 전 대한제국 당시의 상수도관이 지금과 마찬가지의 주철관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고도 흥미롭다. 빨간 녹물 제거의 근본대책은 녹슨 상수도관을 새 수도관으로 교체하는 것뿐이다. 송현배수지는 1908년에 용량 15,577톤 규모의 배수지를 완공 했다. 그러나 생산량 12,000톤, 송수량 9,000톤 규모의 노량진 수원지 정화시설은 1910년에야 마무리됐다. 수돗물 개통식(通 水式)은 1910년 10월 30일에 있었고 그해 12월 10일을 기해 인천지역 급수를 시작했다. 노량진 수원지 수돗물은 서울 양화 진과 용산, 인천으로 급수될 계획이었는데 송현배수지가 공사를 가장 먼저 끝냈다. 그 때문에 노량진 한강수돗물 맛은 서울 시민보다 인천사람이 먼저 봤다. 송현배수지는 당초 인구 7만 명 기준 1인 1일 111.8리터를 급수한다는 계획으로 만들어졌다. 개통 당시 주로 일본인 거류민 가정에 공급됐다. 수도 설치 비용이 워낙 비싸고 수돗물 사용료도 만만찮아 인천 토박이들은 수도꼭지를 달 엄두를 내지 못 했기 때문이다. 1931년 송현배수지는 하루 1만 톤의 수돗물을 공급했는데 매월 12톤 기본 공급 기준에 수도료가 2원(쌀 1말 가격)이었다. 당시 물가로는 꽤나 비싼 편이었다.

  • 1907년경 뚝섬 한강물 정화 상수도 송수관 매립공사 모습 사진1907년경 뚝섬 한강물 정화 상수도 송수관 매립공사 모습. 대한제국 당시 수도관 설치 장면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이다. 노량진 수원지와 인천까지의 수도관 매립 공사는 1906년에 시작됐다.

     

  • 송현배수지 입구 정문의 콘크리트 기둥 사진송현배수지 입구 정문의 콘크리트 기둥
    쇠창살 모양새는 1908년 준공 당시 모습 그대로를 잘 간직하고 있다.

     

  • 1908년 배수지 완공 당시의 송현배수지 입구 사진1908년 배수지 완공 당시의 송현배수지 입구 준공 기념으로 발행된 우편엽서 사진
    (출처 :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 송현배수지 제수변실(制水弁室). 사진 제수변실 상단 전서체 석물 양각 현판 ‘만윤백량(萬潤百凉)’ “반짝이며 흐르는 물이 더없이 맑고 깨끗하여라”라는 뜻으로 현판 글씨는 대한제국시절 관료로 독립신문 발행에도 참가했던 유맹(劉猛)의 솜씨다. 유맹은 일제강점기에도 총독부 관료로 일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기념장과 훈장 다수를 받았다.

     

 

가슴 먹먹한 근대역사의 흔적 - 송현배수지

송현배수지는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전 대한제국 정부가 착공한 관급공사였다. 당시 우리는 산업 근대화 수준이 일본에 비하면 한참 뒤졌다. 배수지 공사는 무늬만 대한제국의 공사였지, 알맹이는 철저히 ‘일제’였다. 일본이 빌려준 대출금으로 공사비용을 충당하고 일본인 기술자가 설계를 비롯해 전 공사과정을 관리 감독하고 운영했다. 한국인의 참여는 수도관을 매립하는 인부 노릇 정도에 국한됐다. 대한제국 정부에 공사비용 대출 브로커 노릇을 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송현 배수지의 준공식 소식도 듣지 못한 채 1909년 10월 6일 아침, 중 국 땅 하얼빈 역에서 애국지사 안중근이 쏜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송현배수지는 준공을 불과 서너 달 앞두고 경술국치(1910년 9 월 28일)를 겪었다. 일제강점 첫해인 1910년 12월에 거행된 송현 배수지 수돗물 개통식 주인공은 당연히 대한제국이 아닌 조선총독부였다. 우리 것이어도 묘하게 다가서는 낯섦, 인천사람이 아니어도 송현배수지를 찾아가 우리 근대 개화기 역사 한자락을 반추해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 아닐까. 나라가 있건 없건, 인천 송현배수지의 수도 관을 흐르는 인천의 한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100% 한국 토종 이기 때문이다.

 

글, 사진 손상익
(소설가, 언론학박사)

손상익 소설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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