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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광장-인천일보(2006. 8. 22)

  • 작성자
    -
    작성일
    2006년 8월 25일(금)
  • 조회수
    486

 

중국의 동북공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고대 우리 역사에 관한 고민들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최근 TV에서도 이와 같은 관심을 반영, 방송국마다 역사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란 있을 수 없다. 역사는 그 민족의 뿌리로서 현재 사회를 평가, 반성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장, 인천에도 역사가 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인천은 개항이전에는 한적한 어촌마을에 불과했었다고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인천의 향토사학계는 이와 같은 입장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기존의 입장은 ‘일제가 한반도를 근대화 시켰던 주역’이라는 식의 일제의 침탈을 합리화하려던 의도에 의해 왜곡되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적을 찾기 드물었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인천을 일제가 앞장서서 개항을 시켰고 그러므로 한반도 산업화의 주역은 일제’라는 논리라는 것이다. 일본이 국교도 수립하기 전부터 남의 나라 연안을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기껏해야 선상에서 바라 본 인천의 모습이 결국은 인천의 해변 일부였기 때문에 그들의 인천에 대한 첫이미지는 이렇듯 한정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천의 뿌리는 조선시기 이전부터 인천이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많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던 지역이며 한반도 문물의 통과 요충지로서 이미 인천은 개항 이전부터 활발한 지역이었다. 즉 인천은 개항이후에 비로서 발전한 도시가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역사의 뿌리가 깊은 곳이란 얘기다.


인천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알고 보면 고려시대에 왕비가 연이어 7명이 나오는 등 이른바 ‘왕비의 고향’이라는 생각에서 왕후의 덕목이었던 어질 인(仁)자를 넣어 인주(仁州)라고 불리워지다가 조선 태종때부터 仁川이 되었던 것이다. 인천은 이미 고려때에도 내노라하는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무역의 통로로서 삼국간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인천의 뿌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다. 또한 인천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곳이다.


최근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에 대하여 많은 관심들이 모아지고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주몽’이어서 상대역인 ‘소서노’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부족하지만 우리는 이 ‘소서노’라는 인물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역사적 사실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유형의 드라마로서 실제 역사적 기술과는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며 보아야 할 줄 안다.


소서노는 계루부족장 연타발의 딸로서 부친의 뒤를 이어 5개 부족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음을 인정받았으나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8살 연하의 주몽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고 고대 동북아의 패주,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렇게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서노는 주몽의 숨겨졌던 아들 유리가 나타나면서 이복형제간의 분쟁을 우려하여 결국 비류-온조왕자와 함께 남하하여 당시 미추홀이라고 불리던 인천지역에 고대 백제왕국을 건국한다.


세계역사상 소서노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원대한 포부와 열린 마음의 불꽃같은 여걸이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는 조선의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제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지난 2005년, 이화여대에서는 ‘제9회 세계 여성학 대회’가 개최됐었고 세계의 여성 지도자들은 충북 생극에 위치하고 있는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에서 소서노여제의 석상 제막식을 가짐으로서 ‘소서노’는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창업한 세계의 여성 지도자로 부활하였다. 고구려시기 인천은 매소홀(買召忽)이라는 지명으로 불렸었다. 매소홀은 ‘소서노(召西奴)가 (고구려 추모왕에게) 돈을 지불하고 산 땅’이라는 의미이다. 인천에 대한 첫 역사 기록은 바로 ‘인천은 소서노의 땅’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소서노의 한결같은 꿈은 ‘고조선의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다물-多勿)이었다. 그러기위해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용이했던 인천이 베이스캠프로서 최적지였던 것이다.
지금 인천은 인천국제공항과 경제자유구역의 활성화등을 통하여 한반도의 심장부로서, 동북아의 중심지로서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천지역이 갖고 있는 과제는 우리 시대에 처음 제시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2천년전 소서노가 인천에서 꾸던 꿈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어 가고 있고 인천이 나가야 할 방향이 이미 소서노여제를 통해 제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역사를 알아야만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논리가 정말 너무나도 들어맞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인천의 뿌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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